김은복 목사 목회칼럼|정의와 공의

마 11:2~5 말씀이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세례 요한의 사역은 정의의 사역이었다. 옳고 그름이 중요했다. 스스로도 그렇게 살아야 했다. 그래서 결혼도 안하고, 광야에 살면서, 낙타 털옷을 걸치고, 음식도 메뚜기와 석청만으로 극도의 절제된 삶을 살았다. 그의 그런 삶과 외침은 힘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뒤에 오실 메시야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으로 충만했다.

 

드디어 예수님이 등장하셨다.

듣던 대로 엄청난 능력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세례 요한에게 질문이 생겼다.

“왜 뒤집지 않으시지?”

 

세례 요한은 현재 잉여의 몸이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이어서 예수님께서 등장하셨으니, 저 썩어 빠진 종교인들과 정치인들을 향하여 추상 같은 날카로움과 어마어마한 능력으로 세상을 뒤집을 줄 알았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어 질문한 것이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뒤집어 말하면, ‘당신에게 실망했습니다’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5절에 있는 말씀대로였다.

 

중요하니까 정리하자.

세례요한의 사역은 정의의 사역이었다.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고 강화하는 것은 중요하다.

법의 목적은 사람을 감옥에 보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영화의 명대사에도 나오듯이, 법은 최소한 이어야 하는 이유가 자명하다.

반면에 예수님은 공의의 사역이다.

즉 살리는 사역이다. 생명을 불어넣는 사역이었다.

 

그래서 율법이 금한 불가촉 나병환자에게 일부러 손을 대시며 치유하시고,

평일에 하셔도 되는데, 일부러 안식일에 사람들을 치유하신다.

이를 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당대의 종교 엘리트주의자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아랑곳없이 예수님이 KO펀치를 날리신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율법의 목적을 정확히 해석해 주신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면, 예수님께서 동일한 말씀을 하시지 않을까싶다.

‘성도가 교회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요 교회가 성도를 위하여 있는 것이다’

그동안 교회성장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래서 땅 팔고 집 팔고, 심지어 보증서가며 교회를 지었다.

이제는 안다.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건물이라는 것을!

목사를 잘 섬기면 그것이 나의 축복이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자신은 굶어도 최고급으로 목사를 대우했다.

그 결과 목사도 망치고, 그들은 신앙을 떠났다.

 

폐일언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한다면, 이제 정의의 목적이 공의에 있도록 하자.

 

그러면 11절이 어렵지 않게 해석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해석: 세례 요한보다 더 정의롭게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천국, 즉 하나님 나라는 공의의 세계다. 긍휼을 기초로 살리는데 목적을 두라. 정의의 목적은 공의니까.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는가?

볼 것도 없다. 주변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생기가 돈다.

우울이 사라지고, 소망의 꽃이 피기 시작한다.

그게 천국이다.

우리 이제 그렇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