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복 목사 목회칼럼|예정론에 대하여

예정론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예정론은 ‘하나님이 미리 이미 모든 것을 정해놓으셨다.

심지어 구원받을 백성과 지옥 갈 백성조차도’라는 주장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예정론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점검할 수 있는 신학적 배경일뿐이다.

 

아시안컵 4강에서 한국이 요르단에 졌다.

새벽에 하는 축구 경기를 라이브로 볼 체력이 안 된다.

아침에 아들이 알려줬다.

축구를 안 본 아빠가 진정한 승리자라고.

 

어이없게 졌다는 소식을 들을 때 열받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한국 축구를 사랑하는 대한민국 사람이다.

일본은 8강에서 탈락했다.

고소하다고 느꼈는가? 역시 당신은 대한민국 사람이다.

 

예정론이 그런 것이다.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나를 지명하여 부르시고 구원하기로 하셨다는 감격이 있다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살아야 할지도 알 수 있다.

혹여 예정론이 불편하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해 봐야 한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라는 말을 듣고 가슴이 설레면,

당신은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똑같은 말을 듣고, “정답! 노사연이 부른 노래”라고 한다면, 볼 장 다 본 것이다.

 

어느 성도가 질문을 했다.

“목사님, 쌍둥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에서가 야곱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한다면, 에서 입장에서는 너무 억울한 거 아닙니까?”

이분은 예정론을 지나쳐 결정론에 대해 항의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정확히 보라.

에서가 야곱을 섬기게 된다는 말씀은 없다.

창세기 25:23 말씀이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즉 섬기는 자가 큰 자라는 메시지다.

 

그렇다면 에서와 야곱의 부모는 어려서부터 먼저 섬기는 자가 되도록 교육의 방향을 잡아야 했다.

그런데, 이삭은 에서를, 리브가는 야곱을 편애한다.

그러니 집안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부터 당신을 영화롭게 하기로 결정하셨다.’ (롬8:30)

이 말이 불편한가? 감사한가?

불편하다면, 더 뜨겁게 예배의 자리로!

감사하다면, 곧바로 사명의 자리로!

이것이 예정론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