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복 목사 목회칼럼|나 달라지기 원합니다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말, “나 원래 이래!”

크리스찬으로서 절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다.
‘나 원래 이래!’다.
이유는,
첫째, 개선의 여지나 의지가 전혀 없음을 스스로 선포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둘째, 가장 교만한 말이다. 왜냐? 나에게 맞추라는 언어적 폭행이기 때문이다.

시편을 보면, 유독 ‘탄식시’가 많다. 탄식의 기도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다.
왜 탄식하며 기도할까?
고침받기 원하기 때문이다.
‘나 원래 이래요’가 아니라,
‘하나님, 도대체 이 꼴이 뭡니까? 고침 받기 원합니다. 달라지기 원합니다’가 소원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탄식이 쏟아진다.

새해를 맞이해서 특별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 있다.
타이틀은 ‘기도에 올인하라’고, 열흘동안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기도를 살피고 있다.
아브라함의 남다른 기도, 야곱의 씨름기도, 모세의 영광보는 기도, 여호수아의 결단의 기도, 한나의 눈물의 기도, 그리고 오늘 새벽에는 다윗의 탄식기도였다. (새삶의 교회 유튜브에서 들을 수 있다)

당신은 어떤가?
계속, ‘나 원래 이래’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나 달라지기 원합니다’로 탄식할 것인가?

복음 중의 복음은 다행스럽게도 ‘내 스스로의 결단이나 의지로는 나를 바꿀 수 없다’는 점이다.
즉 면벽 수도를 해도, 그 어떤 고행을 수행할찌라도 절대로 나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없다.

‘이 성질머리 죽어야 되’가 아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옛사람과 함께 죽으셨다.
우리는 단지 이 진리를 영접하고, 선포하면 된다. 그러니 굿 뉴스, 복음이다.

따라해보라.
“나의 옛 자아는 이미 예수 안에서 죽었습니다”

부활은 십자가를 전제로 한다. 죽지 않았는데, 부활의 새생명을 누릴 수는 없다.
옛 사람의 죽음을 영접한 자만이 예수 안의 새사람으로 살 수 있음이다.

시편 22편을 읽어보라.
절절한 다윗의 탄식을 들을 수 있다. 안쓰러울 지경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 앞에 탄식을 해야 23편의 고백이 가능해진다.

23편이 뭔지는 알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