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복 목사 목회칼럼|칼을 주소서

사무엘상 15:33 말씀이다.
“사무엘이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새번역 성경의 번역이 더 와닿는다.
‘사무엘은 길갈 성소의 주님 앞에서 아각을 칼로 난도질하여 죽였다.’

누가?
일개 목동에 불과했던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울 힘이 있었던 사무엘 선지자가!
누구를?
왕을!
어디서?
성소의 주님 앞에서, 즉 교회의 강대상 앞에서!
어떻게?
칼로 난도질하여!
결과는?
죽여버렸다!

좌우명처럼 내 삶의 푯대같은 말씀이 있다. (마12: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무엇을 쌓고 있든지 그것이 곧 당신의 다가올 삶이다.
노름을 쌓고 있는가? 곧 패가망신할 것이다.
음란을 쌓고 있는가? 큰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술, 담배를 쌓고 있는가? 천국을 굉장히 빨리가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계속 쌓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악이다. 이제는 흘러 넘칠 정도가 되었다.
마치 기름 가득한 자동차의 주유구에 불붙은 성냥이 놓인 모습이랄까.
문제는 그것으로부터 나오게 될 결과다.
그 결과는 백성들의 몫이 된다.
그 피해는 대통령이 당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그리고 우리 자녀들이 치르게 된다.

그래서 사무엘이 더 이상 악이 쌓이지 않도록 아각을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난도질하여 죽여 버린 것이다. 그것 자체가 굉장한 메시지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신앙인은 대단히 정치적이어야 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누구를 향해 외치는가?
권력자들을 향해서다.
오죽하면 열왕기가, 그것도 상하로 있겠는가?
심지어 아모스서는 ‘호외요 호외’라고 외치는 잉크도 마르지 않은 긴급 고발 뉴스의 폼이다.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의 한 대목이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가 닥쳤을 때, 중립을 지키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되었다’
예수님 말씀처럼,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하는 것이 바른 신앙이다.

교회가 이 지경이 된 것도 그 잘난 중립적 태도 때문 아닌가!
‘은혜로 합시다’라는 말의 속뜻은 ‘그냥 덮어두고 넘어가자’가 되어버렸다.

‘용서의 주님’의 전제는 바로 그분이 ‘심판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어떤가?
‘주님, 나에게도 그 칼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겠는가?

혹시 그 칼을 이미 가졌다면,
가장 최우선적으로 처단해야 할 악이 있다.
내가 계속 쌓아 가고 있는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습관들이다.
그 후에는 그 칼이 외부를 향해 힘을 갖게 된다.

정말로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