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하고 싶은 시가 있다.
이 시의 제목은, “편집부에서 온 편지”다.
‘귀하의 감동적인 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옥고는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면에는 약간 어울리지 않음을
무척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편집부에서 오는 이런 거절 편지가
거의 매일 날아온다. 잡지마다 등을 돌린다.
가을 내음이 풍겨 오지만, 이 보잘것없는 아들은
어디에도 고향이 없음을 분명히 안다.
그래서 목적 없이 혼자만을 위한 시를 써서
머리맡 탁자에 놓인 램프에게 읽어 준다.
아마 램프도 내 시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말없이 빛을 보내 준다. 그것만으로 족하다.
혹시 이 시를 쓴 시인을 아는가?
그가 이 시를 쓴 시점은 50세였다.
그는 이미 십 대에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라고 선언할 정도로 시를 사랑했고, 압도적인 재능을 보여 주위의 찬사를 받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출판사나 잡지사로부터 수없이 거절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 그날도 거절 편지를 앞에 놓고 이 시를 썼으리라.
밝혀야겠다.
이 시를 쓴 시인은 인류 문학의 최고 반열에 오른 헤르만 헤세다.
헤세는 결국 69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인정을 받고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나는 이 시를 참 좋아한다.
첫째는 헤르만 헤세도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그런 시기가 있었다는 것이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둘째는 왠지 그 수많은 거절 속에서 탄생한 이 시의 깊은 고독감이 그리 어둡지 않다는 점이다.
셋째는 끝내 포기하지 않고, ‘타인의 찬사를 들으려는 목적 없이’ 계속해서 글을 썼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이 시의 끝줄에 있는 오묘한 독백,
‘시를 써서 혼자 소리 내어 읽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라는, 그 마음이 내 마음에 닿았기 때문이다.
믿음의 동의어가 견딤, 인내라 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견딤을 기대하실까?
왜 우리의 응답에 속 시원하게 쏘시지 못할까?
왜 시편의 수많은 고백들처럼 우리로 하여금 탄식하게 하실까?
목회가 지칠 때가 있다.
어디 목회뿐이랴!
사업하다가 지칠 때가 있을 것이며,
관계에 지칠 때가 있을 것이고,
기대하고 기도했지만, 보기 좋게 빗나간 응답에 지칠 것이다.
그때 최후의 일격이 날아온다.
악인의 형통이다.
시편 73편이 바로 그 내용이다.
이왕이면, 쉬운성경 버전으로 읽어보라.
너무 외롭고, 아프고,
힘들고 지칠 때,
‘하나님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
조목조목 아뢰며, 신랄하게 항의하며 기도한 적이 있다.
당연히 응답이 없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이런 기도가 내 입에서 나왔다.
‘주님의 마음을 부어주옵소서’
그때부터 말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주님의 마음은, 세상을 바라보는 주님의 눈이요 생각이었다.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탈진으로 시작했던 기도가
주님의 마음을 만나고 나니 이 찬송으로 마무리되었다.
그게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다.
시편 73편의 마지막 행도 그렇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입니다”
탄식을 통해, 고난을 통해, 거절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엿보게 된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내어주실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을.
그냥 속 시원하게 심판해 버리고 다 지옥으로! 했으면 간단히 끝났을 텐데…
선명하게 기억한다.
기도가 그렇게 극적으로 마무리되었을 무렵,
‘싫어요, 아파요, 미워요’가
‘좋아요, 감사해요, 계속할게요’가 되었다.
치유였다.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십자가가 왜 소망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