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혁명 이후의 이야기다.
모든 사유재산을 평균화시켰다. 부자들은 낙심했고, 가난한 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난 후, 부자였던 사람은 또 부자가 되고, 가난했던 사람은 다시 가난하게 되었다.
사회과학에서 이것을 근거로 경향성을 설명한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왜 SKY 졸업생들을 선호할까?
그들은 주어진 문제를 이해하고 풀어내고 성취하는 일관된 경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 안에 자리 잡은 잘못된 경향성이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이 그랬다.
위기의 순간에 시리아 의지하다가, 시리아가 망하니 앗수르를 의지한다.
앗수르가 위태하니 이제는 애굽을 의지한다. 하나님께로 가는 흐름을 잊은 거다.
역시 경향성이다.
경향성은 일종의 고집이다.
고집이 교만을 낳는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교만하면, 제일 먼저 망한다는 뜻이다.
이사야 30:18 말씀이다.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내 흐름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을 기다려보라.
그리고 이어지는 21절 말씀이다.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경향성을 깨는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말소리를 따라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 자꾸 물으라. 그러면 분명히 말소리가 들린다.
애굽의 바로가 모세를 통해 들려진 하나님의 메시지를 거부했다.
그로 인해 10가지 재앙이 애굽에 퍼부어졌다.
여덟 번째 재앙인 메뚜기 재앙이 선포되었을 때, 애굽의 신하들도 바로를 설득한다.
‘그들을 내보내셔서 그들의 하나님인 여호와를 예배하게 하십시오.
왕은 애굽이 망한 것을 아직도 모르십니까?’(출10:7. 새번역)
그런데 바로의 고집과 교만이 뒤섞인 경향성이 결국 10가지 재앙을 다 만나게 되었다.
미련한 것이다.
어떻게 재앙을 연거푸 열 번을 맞이하는가! 어리석음이다.
빠르면 두 번째 재앙 후, 늦어도 네 번째 재앙을 만났을 때, 자신의 경향성을 깼어야 했다.
“하나님께 나가야 하는데….”, 혹은 “기도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드나?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말소리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멀리 나가려던 경향성을 깨라.
즉시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인생의 흐름이 달라진다.